판도라의상자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조선의 '술주정' 백태

날으는꼬꼬 2013. 12. 6. 12:19

우리나라의 꽐라 역사는 유구하구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031115141&code=960100&cp=ptm

 

선임기자 http://leekihwan.khan.kr/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조선의 '술주정' 백태

 

 

“소가 물 마시듯 하며 마시는 저 사람들은 뭐냐.”

다산 정약용이 둘째 아들(학유)에게 쓴 편지의 내용이다. 연말연시 송년회다 신년회다 해서 부어라 마셔라 하는 분위기에서 절대 기억해야 할 금과옥조다. 다산이 말을 잇는다.

“(저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를 적시지 않고 곧바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무슨 맛이 있겠느냐.”

다산은 술버릇 가운데 특히 ‘원샷’을 두고 절대 있어서 안될 술버릇이라 일렀다.(<다산시문집> 제21권 ‘서·유아)

다산은 편지에서 “난 이날 이때까지 술을 크게 마신 적이 없어 주량을 알지 못한다”고 자신의 주량이 보통이 아님을 은근히 과시했다.

“예전에 상감(정조)께서 삼중소주(三重燒酒)를 옥필통(玉筆筒)에 가득히 부어서 하사하신 일이 있었다. ‘오늘 죽었구나’ 하고 할 수 없이 마셨는데 취하지 않았다. 또 한번은 술을 큰 사발로 하사받았는데 다른 학사들은 모두 인사불성이 됐다. 어떤 이는 남쪽으로 향해 절을 올리고, 또 어떤 이는 그 자리에서 누워버리고…. 그러나 난 시권(試券·과거답안지)을 다 읽고, 착오없이 등수도 정했다. 물러날 때에야 약간 취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너는 내가 술을 반 잔 이상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그러니까 주량은 엄청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한 잔 이상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산은 “소가 물마시듯 목구멍으로 들이부으면 안된다”면서 “참다운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고 했다. 술의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혜원 신윤복의 <유곽쟁웅>. 유흥업소 기생을 차지하기 위한 남성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갓과 양태가 벗어지도록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가운데 웃통 벗고 있는 수염난 이가 승리자이다. 싸움에서 진 이가 씩씩 거리고 있다.|간송미술관

 


 

 

■‘소가 물마시듯 하는 자들은 뭐냐’

“저 얼굴빛이 주귀(朱鬼)와 같고 구토를 해대고 골아 떨어지는 자들이야 무슨 정취가 있겠느냐. 요컨대 술마시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대부분 폭사(暴死)하게 된다. 술독이 오장육부에 스며들어 하루아침에 썩기 시작하면 온 몸이 무너지고 만다.”

그러면서 “무릇 나라를 망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내는 흉패(兇悖)한 행동은 모두 술로 말미암아 비롯된다”고 경계했다. 다산은 또 공자의 유명한 화두를 ‘절주’와 연결시켜 해석했다.

공자의 화두란 그 유명한 ‘고불고 고재고재(고不고고哉고哉·모난 술잔이 모가 없으면 모난 술잔이겠는가. 모난 술잔이겠는가)’이다.(<논어> ‘옹야 23장’)

다산은 선문답 같은 공자님의 말씀을 “고라는 술잔을 사용하면서도 주량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어찌 고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해석했다.

청나라 시대 고전학자인 모기령도 “‘고불고’는 술주정을 경계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술그릇의 이름인 ‘고’는 ‘두 되 정도 담을 적은 양의 술잔’을 의미한다는 것. 예전에는 술 마시는 양을 3되를 적당하다고 하고, 5되를 과하다고 했으며, 2되를 적다고 했다는 것. 그런데 공자의 시대에 과음의 풍조가 퍼지자, 공자가 ‘어찌 고를 고라고 하겠는가’라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다산은 과도한 음주로 발생할 지도 모를 갖가지 병을 열거하면서 “제발 술을 입에서 끊고 마시지 마라”고 신신당부한다.

“술로 인한 병은 등창이 되기도 하며, 뇌저(腦疽)·치루(痔漏)·황달(黃疸) 등 별 기괴한 병에 걸리게 되는데, 이럴 경우 백약(百藥)이 무효가 된다.”

 

 

상나라 시대 무덤인 부호묘에서 발견된 고. 고는 원래 술 2잔 정도를 담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술잔이다. 술을 적당히 마시라는 뜻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를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예로부터 술그릇인 ‘이(이)’에는 ‘배(舟)’가 그려져있는데, 이것은 뒤집힘을 경계하는 것이다. 또 술주정을 ‘후(후)’라 하는 이유는 술(酒)로 인한 흉(凶)을 경계하는 것이다. ‘취(醉)’자는 죽음을 뜻하는 ‘졸(卒)’에 매여있고, 술에서 깬다는 뜻의 ‘성(醒)’은 살아난다는 ‘생(生)’에 매여있다. 또 술잔을 뜻하는 ‘치(치)’는 위태롭다는 ‘위(危)’와 비슷하고, ‘배(杯)’는 ‘불(不)’에 속한다.”(<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 6’)

 


■훌훌 옷까지 벗고 술마시는 풍토는

그러고보면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술문화는 못말리는 풍습이었던 것 같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인 김종직도 <밀양향교 제자(諸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잘못된 술문화를 맹비난하고 있다.(<속동문선> 제12권) 향교 학생들까지 음란한 술문화에 젖었다는 것이다.

향교가 습속을 무너뜨리고 있다. 잔칫날에는 명륜당 위에 기생의 풍악이 앞에 놓이고, 선비들이 둘러앉아 음란한 노래와 춤 로 밤낮을 계속한다. 스승의 자리에 있는 자도~ 입을 다물고, 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술주정을 하며, 옷을 벗는 자도 왕왕 있다고 하니, 슬프다.”

향교에서조차 창녀들을 불러 술잔치를 벌이고 옷까지 벗고 술주정을 벌이는 행태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찌 일찍이 세속의 남녀가 서로 만나서 금수의 행위와 같이 하는 것을 낙으로 삼게 한 것이랴”고 한탄했다.

어찌 그렇게 지금의 행태와 같은 지….

1397년(태조 6년)에는 소감(종4품) 최선과 전 정언 최굉·전 정랑 이반 등이 여성 도우미(창녀)를 불렀다. 풍악을 울리고 술을 질펀하게 마신 것도 모자라 남의 집에 난입하여 집기를 부수는 등의 술주정을 벌이가 적발됐다. 특히 최선과 최굉은 할머니 상중(喪中)에 그런 음란한 죄를 저질렀다. 임금은 이반은 용서했지만 최선과 최굉은 엄벌에 처했다.

1447년(세종 29년)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가 술주정을 하다가 사람을 죽였다. 그 때문에 원래는 서산군(瑞山君)이었던 이혜는 황계령(黃溪令)으로 작위가 깎였으며 경남 고성현으로 유배됐다.

아버지인 양녕대군도 고을 백성에게 소주를 강제로 먹여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이유로 1422~23년 사이 대사헌과 문무관 2품 이상 관리들로부터 대대적인 탄핵을 받은 적이 있다. 바로 그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 역시 술주정 때문에 신세를 망친 것이다. 부전자전인가. 왕족이었으니 망정이지, 술주정에 생사람을 죽은 행위는 천추에 오명을 남길 일이 아닌가.


■어전에서 횡설수설, 술주정한 죄는

그런데 아무리 어전(御前)에서 술주정으로 임금에게 무례를 저질렀다 해도 정색하고 처벌하기란 쉽지 않았다.

술 때문에 강상의 죄를 범했거나, 역린을 건드린다면 몰라도 그렇지않은 경우 ‘속좁은 임금’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으리라.

예컨대 1440년(세종 22년), 판중추원사 이순몽의 주사는 악명이 높았다. 노비 문제로 형조에 소송했을 때, 술에 취해 형조의 당상관을 욕하고 꾸짖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운 그를 쉽사리 벌할 수 없었다. 대신 세종은 그를 불러 단단히 훈계했다.

“경의 나이 이제 늙었으니 일을 요량할 때인데, 어찌하여 광패(狂悖)한 성질이 늙도록 그치지 아니하는가. 지금부터 마땅히 더 근신하여서 광패하고 망령된 짓은 하지 말아라.”

한마디로 나잇값 좀 하라는 이야기였다. 이 대목에서 <세종실록>의 기자는 “임금이 모두 용서하고 죄주지 않아 그의 술주정과 광패함이 늙어가면서 더욱 심했다”고 꼬집고 있다.

또 1456년 1월 세조는 사정전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런데 이 때 동부승지 이휘가 “이석산 살인사건의 진범은 민발이라는 사람”이라고 고했다.

‘이석산 살인사건’이란 이석산이라는 자의 시신이 남근이 난자당하고 눈알이 뽑힌채 발견된 사건을 일컫는다. 그런데 동부승지는 술맛 달아나게 ‘살인사건의 진범’ 운운하면서 술자리 분위기를 깬 것이다. 이 때 좌헌납 구종직이 “사건을 재수사해야 한다”고 한술 더 떴다. 술판의 분

 

전국시대 중산국의 왕릉에서 발견된 2300년 전의 술병과 술. 동이의 후손으로 알려진 중산국의 술은 전국시대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위기가 깨질 것 같자 세조 임금은 세자를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자, 너는 저 구종직이라는 이의 사람됨을 아느냐? 참으로 어진 선비니라.”

그러나 이미 술이 거나하게 취한 구종직은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이석산 살인사건에 연루된 이들을 방면해서는 안된다”고 거듭 말했다. 그런데 만취상태에서 구종직의 말이 중언부언, 횡설수설했다.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결국 직언은 지루한 주사가 되어버렸고, 세조는 파평군 윤암에게 “끌어내라”고 명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구종직은 하늘이 노랬다. 단숨에 임금에게 달려가 엎드려 고했다.

“전하, 소신이 어제 그만 술에 취해서…. 청컨대 대죄하게 하소서.”

하지만 뜻밖이었다. 세조는 “과인이 살인사건을 최종 판결했는데 왜 이론을 제기했느냐”고 타박하면서도 “그러나 네가 연로했음을 불쌍히 여기니 어서 본연의 직무에 나서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 뿐 아니라 임금은 구종직에게 관작 1계급를 올려주었다.(<세조실록>)


■술주정 때문에 탄로난 살인죄

못말리는 술주정 때문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예컨대 <동문선>에는 주사 때문에 붙잡힌 살인범 내연남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서울에 사는 어떤 목공의 아내가 내연남과 짜고 남편(목공)을 살해한 뒤 방 구들장을 뜯고 그 밑에 시신을 숨겨놓았다. 죽은 남편은 상사(공장)와 다툰 뒤 화해주를 거나하게 마시고 돌아오던 길에 변을 당했던 것이었다. 남편을 살해한 아내는 남편과 다퉜던 공장에게 살인죄를 뒤집어 씌워 고소했다. 이에 붙잡힌 공장은 모진 고문을 감당하지 못한 채 짓지도 않은 죄를 허위로 자백하고 말았다. 공장은 이 사건으로 참형을 당했다. 다른 목공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공장의 한을 풀어주고자 현상금(돈 100정)을 걸고 방을 붙이는 등 범인 색출에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도둑이 남의 집에 숨어들어 도둑질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집은 바로 내연남과 함께 남편을 죽인 그 아내의 집이었다.

그런데 술취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술주정을 하면서 집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남자는 여자의 내연남이었다. 내연남은 여자에게 욕을 하고 주먹과 발로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술주정하던 남자가 잠이 들고나서야 신세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너 때문에 남편을 죽여 방구들 밑에 둔 지 2년이 지났는데…. 방에 불도 못 때고, 수리할 수도 없게 됐는데…. 내 (옛) 남편이 다 썩었는지 안 썩었는지 모르겠구나. 그런데 너는 날 이렇게 학대하다니….”

19세기 말 술자리 광경. 술 때문에 폭행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숨어있던 도둑이 이 말을 듣고는 곧바로 목공들에게 달려가 들은 바를 전하고는 현상금을 요구했다. 도둑의 이야기를 들은 목공들은 한걸음에 달려가 구들장을 뜯고 동료의 시신을 찾아냈다. 결국 내연남과 짜고 남편을 죽인 아내는 내연남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완전범죄로 묻힐 수 있었던 사건이 내연남의 술주정 때문에 전모가 드러난 것이었다.


■‘취중진담은 분명히 있다.’

“술에 취하면 천자라도 안중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취중에도 역시 진실은 드러나는 법이다.”

술주정에 의한 살인죄를 판결하던 정조 임금의 ‘말씀’이시다. ‘취중진담’을 말한 것이다. 1791년(정조 15년) 술자리에서의 다툼이 결국 살인으로 비화한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술자리에서 살인범은 “너는 마지기(馬直·궁방 하인)의 자식이다”라고 부른 동료를 머리로 받고 돌로 때려 죽인 자가 체포됐다.

이때 정조는 이 사건을 판결하면서 예의 그 ‘취중진담’ 이야기를 꺼내면서 “범행에 사용한 흉기를 보면 고의범행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정조는 “피살자가 ‘마지기의 자식’ 운운하자, 분노감에 독기를 드러냈으니 사납고 모진 행위에 대해 당연히 시행할 율문을 시행해야 한다”며 사형을 결정했다.

이 이야기는 <심리록>에 나오는 것이다. <심리록>은 조선조 정조 시대의 각종 살인사건 판례집인데, ‘주폭’으로 인한 살인사건의 전모가 심심찮게 보인다.

 


■‘술, 싸움, 실수가 죄라면 죄’

1784년(정조 8년)의 일이다. 친구들끼리 “청주를 시키느냐 탁주를 시키느냐”를 놓고 헛된 말다툼을 벌이다가 칼부림이 벌어졌다.

문제는 그 중 한사람이 사타구니와 넓적다리를 찔려 사망했다는 것이다. 형조의 공초내용을 보고받은 정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초 칼부림이 일어난 것은 장난이 아니면 술주정이고, 술주정이 아니면 실수임을 알 수 있다. 살인의 원인은 바로 술이요, 싸움이요, 실수이다. 이 중 하나만 해당되어도 오히려 살려 줄 수 있는데, 더구나 셋을 겸하였음에랴.”

정조는 피살자의 상처가 급소에 있지 않음을 중시하면서 “용의자가 애당초 살해할 마음이 없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판결했다. 용의자는 정조 임금의 관대한 처벌 덕분에 ‘과실치사죄’로 사형을 면했다.

술자리 다툼 과정에서 발로 동무의 불알을 마구 차서 죽인 사건도 일어났다. 1783년(정조 7년)의 일이다. 충청도 아산의 광대 박삼징이 친구(황성재)와 함께 마을 모임에 갔다가 술에 취해 벌인 다툼 끝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심리록>의 내용을 보자.

“(상처)음낭이 약간 붉은색으로 변하고, 불알이 오그라붙었으며, 척추가 붉은색으로 변하여 약간 단단하였다. (판결)죽음을 재촉하는 급소를 쳤고, 목을 잡다 던진 사실이 인정된다. 용의자가 늙었지만 용서할 수는 없는 일. 사형에 처할 뿐이다.”


■공무원 주폭자들

지금으로 치면 공연히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이른바 공무원 ‘주폭’도 여러 명이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무예별감 하경연이라는 자가 정동 근처의 길가에서 술주정을 부리며 발악하다가 말리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때리다가 적발돼 곤장 100대의 중형을 받았다.

또 1780년(정조 4년) 별감 이경주라는 자가 술만 마시면 상습적으로 술주정을 부리다 적발됐다. 당시 형조의 심문내용이 재미있다.

“이 놈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제명한 적도 있었고, 형조에서 처벌한 적도 있었고, 노비로 강등시킨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개전의 정이 없으니…. 일단 곤장 10대를 치고 공초를 받아….”

이경주는 결국 구류 처분을 받았고, 부하의 상습 술주정을 막지못한 상관(행수별감) 마저 문책을 당했다.

 


■이태백도 아니면 차나 마셔라

그러나 아무리 술과 술주정을 경계하고 처벌한다 해도 사라질 행태인가.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술이 술을 마시게 되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되는데….

목은 이색의 시를 보면 이런 시귀가 나온다.

“태백이 부른 노래가 천고를 비추고 있지만(太白歌行映千古)/천재가 아닌데 흉내 내면 술주정만 부리리다(徒能使酒非天才)/객 떠나고 술동이 빈 때 홀로 노래를 뽑으니(客去樽空時獨唱)/광활한 천지 사이에서 풍뢰가 호응하오그려(天地闊遠呼風雷)”(<목은시집> 제34권)

이태백처럼 천재도 아니면서 이태백의 풍류를 따라하면 그저 술주정을 부리는 격이 될 뿐이니 차나 한잔 하라는 것이다. 견디지도 못할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술 끊겠다고 어머니께 맹세했건만…’

조선조 남효온의 시문집(<추강집>)에는 남효온이 김시습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려있다.

“술이 중도를 잃으면 머리를 풀고 노래하며 어지럽게 춤추고, 시끄럽게 부르짖고, 넘어지고 자빠져서 예의를 무너뜨리고 의리를 없애며 소동을 일으킵니다. 마음을 풀어놓고 눈을 부라리다가 싸움이 일어나서 작게는 몸을 죽이고, 더 나아가서는 집안과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경우가….”

그는 “맛있는 술맛이 사람을 변하게 하여 점점 술주정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주정하는 줄조차 모르게 되는 것은 이치상 필연적인 것”이라고 경계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는 술을 끊겠다”고 다짐한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술을 몹시 좋아하여 비난을 받았고, 방자하게 주광(酒狂)이 되었습니다.~점점 부덕해져서 집안에서 방자하게 주정을 부리다가 어머님께 크게 수치를 끼쳤습니다. 술의 죄가 3000가지 중의 으뜸에 해당되니, 무슨 마음으로 다시 술잔을 들겠습니까. 어머니께 ‘지금 이후로는 임금의 명령이 아니면 감히 마시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답니다.”

술을 즐기고, 주사를 부리다가 어머니로부터 ‘술을 끊으라’는 걱정을 듣자 금주선언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남효온은 김시습에게 다짐의 사연을 보내면서 한가지 토를 달았다.

“그러나 제사 지낸 뒤 음복한다거나 축수(祝壽)를 올리고 술잔을 되돌려 받는 경우에는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또 술이 뱃속을 적셔도 어지럽지 않은 경우는 또 어쩌겠습니까.”

어머니 앞에서 금주선언을 한 남효온이었지만, ‘어쩔 수 없을 때, 그리고 술이 달 때는 어쩌겠냐’고 입맛을 다시며 하소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역성 좀 들어달라’는 말이었다.

 


■필름만 끊기지 않으면…

그러자 김시습은 남효온의 편지가 무슨 뜻인 줄 알고 박자를 맞춰주었다. ‘술을 완전히 끊기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라고 답한 것이다.

“옛사람이 술을 베풀었던 까닭은 선조에게 제사 지내고 손님을 대접하고 노인을 봉양하고 병을 다스리고 복을 빌고 기쁨을 나누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살피지 않고 그저 술이 재앙을 낳는다고 여겨서 곧바로 완전히 끊고자 하니…. 이는 마치 밥을 짓다가 불똥이 튈까 염려하여 일생 동안 익힌 밥을 차리지 않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김시습은 술을 마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면서 적당히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기고 주정을 부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술에 일정한 양이 없었으나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위 무공(재위 기원전 812~758년) ‘세 잔에도 기억하지 못하거니 하물며 감히 또 더 마신단 말인가’라고 했습니다. 위 무공 또한 완전히 끊은 것이 아니라 술을 경계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공자는 주량을 알 수 없었지만 정신이 늘 멀쩡할 정도로만 술을 마셨음을 알 수 있다. 또 위 무공의 경우 스스로 석 잔 술에 필름이 끊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자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시습은 마지막으로 “선생(남효온)이 멀리 혼자 살 것 같으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종신토록 끊는다는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시습의 맞장구야말로 남효온이 바라던 답장이 아니었을까. 그 답을 바라고 간절한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술은 중도를 지켜야 한다”는 금과옥조를 과연 누가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바야흐로 술의 계절이 다가왔는데….